【시집 평】
시를 향한 열정, 그는 운명처럼 시를 쓴다.
기노현(문인)
흔들릴 때 마다 서울의 M병원과/ 그 뒤로 수차례의 광주요한병원에 입원 당했던 일을 생각하라/ 그 이후의 끝없는 퇴행을 생각해보라/ 정신 나간 막내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이제는 작고한 큰 형님/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부산까지 떠밀려 갔을 때 두 번이나 보호해줬던 사촌 형을 생각해 보라
부산에서 신용카드와 지갑 등 일체를 베레모 쓴 군인에게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채 밤새 헤매던 일/ 새벽녘에 네게 옷을 입혀 준 파출소 순경과/ 자기의 점심 도시락을 네게 주어 허기를 채우게 하고 택시비를 주었던 이름 모를 천사 미용사를 생각해 보라
흔들릴 때 마다 광주 운암아파트와 기업은행호남본부 시절을 생각해보라/ 요한병원에서 갓 퇴원해 독한 약 때문에 근무하기 어려웠던 시절/ 직장을 그만두면 아내와 자식들이 굶어 죽지 않을까 염려했던 암울한 시절/ 이제는 그 절망의 내용까지도 잊은/ 흔들릴 때마다 약물 중독으로 손이 떨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했던 기억/ 서울대병원 가는 길 온몸이 떨려 소변을 바지에 흘린 기억을 생각해보라
흔들릴 때마다 삼십대 이후 봄이면 봄마다 병이 재발하여 아내가 수없이 흘린 눈물을 생각해보라/ 살아서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너를 지금까지 눈물로 간호한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을 생각해보라/ 가난하다고 생각이 들면 마이너스로 시작한 신길동 단칸 신혼 방을 기억하라/ 가전제품이라고는 골드스타 선풍기 하나, 김치를 보관하려면 안집 냉장고를 이용했던 시절/ 그 시절을 생각하면 몇 천 배의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흔들리지 마라 돌보지 못했음에도 잘 커준 딸과 아들 평생을 따라다니던 병까지 네게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라
<흔들릴 때마다> 전문
마치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 듯하다. 시를 다 읽고 한 참 동안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가슴만 먹먹하다. 어떻든 지금은 어둠의 긴 터널을 벗어나 부지런히 시를 쓰고 있다. 벌써3 권의 시집을 만들어 냈고, 또 이 시집도 준비한 것이다. 박 종복 시인은 마음의 병이 중증에 이르고 치료약의 부작용에 심신이 황폐해질 무렵 정신줄인 양 시를 잡았다. 그리고 시에 열등의 상흔(傷痕), 절규하는 고독, 돌풍 같은 방황 등을 마구 토해냈다.
얼마 전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해 자책하듯 <친구여, 내 시에 침을 뱉게>를 쓴다. 함축된 시제(詩題)가 보이 듯 자신의 시에 대하여 부끄러운 열등감을 갖으나, 한편 자기 나름의 시를 꿋꿋이 쓰겠다는 신념을 <미안하지만 나는 희망을 노래하리라>에서 보이고 있다. 결국 그는 시와 사랑에 빠져있다.
- 절대자유를 찾기 위한 자기 연마
절대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어떤 환경에서도 얽매임이 없고 자기 의지대로 환경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고 그것에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우선 몸이 자유로우려면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하고, 마음이 자유로우려면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려면 '인간 성선설' 발로 기점의 순수를 되찾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아니면 절대 자유에는 못 미치더라도 삶의 과정를 구도(求道)의 자세로 살아야 그나마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극에 대한 내성이 강해지면서 욕망과 쾌락의 욕구는 무한히 성장하니 고독과 방황이 따를 수밖에.
박 종복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기 연마의 훈련을 부지런히 하고 있다. 쓰레기 매립층처럼 쌓여 있는 욕망의 퇴적을 파내 버리는 작업을 시작과정을 통해 한다. 곧 자기성찰인 것이다.
대나무가 비어 있어야
피리가 될 수 있듯이
비우고 또 비워서
치허(致虛)에 이르라고 스승은 말했다
무념, 무상, 무욕
아무 것도 아닌 것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라고
스승은 강조하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대나무가 아닌 고목이 되었고
온갖 잡념과 물욕 투성이의
인간쓰레기가 된 자신을 본다
<비우고 또 비우라> 전문
자유를 위한 자기 연마의 구체적 행동지침의 하나다.
인생은 기다림과 희망이 있어 힘든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 중략-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붙들고
기다림과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오늘을 버티겠는가?
사람은 기다림과 희망을 먹고 산다
기다릴 줄 아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지혜이고
희망은 그 버팀목이다
<기다림과 희망> 전문
구체적인 희망을 설정하여 몰입 노력하고 묵묵히 가다리다 결과에 크게 희비하지 않는 삶 속의 성실함이다.
태풍의 영향으로 나뭇잎이 심하게 흔들린다
운명 앞에 심하게 흔들리는 여자
흔들리다 멈출 것인가
가지가 꺾일 것인가
운명이 가혹하면 송두리째 뽑힐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가지를 보고 있던 사내가 담배꽁초를 버린다
그래 흔들려도 좋다
꺾이지만 뽑히지는 말아라
나도 한 때 바람 앞에 등잔불이었다
<바람의 여자> 전문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관조의 냉철함이다.
- 자신을 잘 다스려 스승으로 삼다 - 자신에게 잠언을 주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겠다
다만 이것만은 묻자
아픈 데는 없냐?
심하게 아픈 데가 없다면 됐다
건강하면 행복할 수 있으니까
<질문> 전문
건강에게 가능성의 모든 것을 열어 놓았다. 희망이 삶의 원동력이다 는 시인의 삶 철학에 닿아 있다.
‘심무가애 무유공포’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는 반야심경 나오는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지혜의 말씀대로 절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함을 알고 있다/ 탐욕도, 분노도, 증오도, 사랑에 대한 미련도
생활은 단순해야 하고/ 말은 적어야 한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살고(글을 쓸 때는 악풀이 아닌 한 자기표현에 투철해야 하지만)
인간관계는 최소화하고/ 고독을 친구 삼아 홀로 있는 연습도 하자/ 누군가는‘친구는 한 사람이면 족하고,/ 두 사람이면 많고, 세 사람이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심산의 바위처럼/ 절해고도의 갈매기처럼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전문
관조하는 숙성된 고독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이빨 사이에 음식이 끼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양치질하거나 치간 칫솔로 그것을 빼내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苦란 이빨 사이에 낀 음식과 같다
解脫이란 그것을 빼낸 후의 시원함이다
<苦와 解脫> 전문
그렇다 한 개인의 존재감은 정말 가벼운 것이다. 고와 해탈은 바로 등 대고 있다.
- 시의 즐거움
틈새라는 골목 안 조그만 찻집에서
비오는 창밖을 보며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린다
비 한 번 신나게 오네
핫 아메리카노의 열기가 손 끝에 느껴지고
나는 창밖의 비오는 모습을 보고
한 여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한다
비 오는 가을 날 하오
핫 아메리카노의 향기가 좋다
또 한 남자와 여자 둘이 들어와 틈새는 비좁고
창밖의 비는 詩원하게 오고 있다
<틈새> 전문
틈새라는 찻집이름과 거기 사람들 틈에 매체가 된 커피, 그 틈새에서 창밖의 시詩원한 비가 불러온 수채화다.
한 번 먹는 먹이를
되새김질 하는 나는 반추동물이다
어제 그가 내게 한 말은
다시 씹어보니 가시가 씹히네
어떤 여물은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데
어떤 것은 쓴맛이 나
여물이 거칠 면 아무리 되새김질 해도
소화가 안 돼
<되새김질> 전문
생활 속의 소소한 풍경이나 의미들을 수채화 같은 시로 써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복사꽃이 피었다
다시 봄이다
해마다 복사꽃이 필 때마다 나는 봄앓이를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프지 말자
복사꽃이 지고 있다
복사꽃이 지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꽃이 져야 탐스러운 복숭아를 맛 볼 수 있으니
무엇이든 핀 것은 져야 열매를 맺는다
우리도 언젠가 질 텐데
질 때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희망 하나 던져 줄 수 있을가
<복사꽃 피고 질 때마다> 전문
무릉도원이라 했으니 복사꽃의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시인은 복사꽃 나무에 애정이 많은 듯하다. 복사꽃과 봄과 시인의 희망은 서로 연결되어 시인의 삶 구성 요소가 되어 있다. 복사꽃이 지면 봄이 가고 봄이 가면 시인의 희망도 사라진다. 수 십 년을 복사꽃이 피고 지고, 시인은 좌절하고 방황한 삶이었나 보다. 지금에 와서 '기다림과 희망'이 시인의 삶 철학이 된 과정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소소한 만족들을 버리고 지연시켰을까? 기다렸을까?
- 단상(斷想)의 시들
이 시집의 중 후반부의 시들은 말 수가 적다. 잔소리 같은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고 담백하다. 그 만큼 시인의 시 의식이 잘 정돈되어 있고 시정(詩情)이 평온해져 있다.
좋은 시의 조건이 세세한 부분까지 정형화 되어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생활 속의 사물이든, 상황이든, 생각이든, 어떤 것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단 그것들을 어떻게 미적 결과물로 생산 해내는가는 시인의 역량이고 그 시의 작품성이다. <외등>, <오랑우탄을 보며>, <벌초>, <앵무새, 죄수, 광대>, <예수가 부처를 만나러 길을 나서다>, <목숨1,2 >, <호모루덴스>, <뱀의 영토>, <속세에 살아도>, <마라경 하라경>, <넵둬부러>, <하루분의 삶>, <집착>, <기다림과 희망>, <혼자 있는 시간을 연습하자> 등에서 다양한 주제와 소재가 상상력에 의한 풍부한 발상으로 시작(詩作)되었고, 시어(詩語)가 매끄럽게 조탁되어 시 맛이 한 층 살아 있다. 앞으로 더욱 시인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한다.
복사꽃 피고 질 때 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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