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직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타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ㅡ <시감상 박고암 ㅡ>
초경을 할 나이
황지우 시인이 이 시를 몇살 때 썻는지 모르지만
황지우 시인은 나와 동갑이니 그 즈음에는
중학교 3학년 ,고등학생이었을 때 초경을 했으리라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 (10살 )이면 초경을 한다지만
초경, 놀랍고도 신비한 것이다.
이제 임신을 할 수 있고 폐경까지 여자의 일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딸아이를 껴안을 수도 없는
그렇다면 황지우 시인은 40중반 쯤 이시를 썻는 지도 모른다.
이제 환갑을 갓 넘긴. 노인 축에도 들지 못한, 지하철 경로석에
앉기가 껄끄러운 어중간한 나이.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흐린 주점에 홀로 앉아 있을 먼 훗날의 자신을 미리 본 것인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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