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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시세계

koarm 2022. 3. 12. 10:10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6<거리>를 국제신문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 마비로 작고하였다

 

얼굴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밤 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1926.8.15.~1956.3.20.)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리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1956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러졌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움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찿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매어 우는데

 

 

<시감상 박고암>

버지니아 울프(1882.1.25~1941.3.28)와 박인환(1926.8.15~1956.3.20)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19413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 강에 뛰어 들어 60세로 생을 마감한 <등대로>를 쓴 영국소설가 울프

수려한 외모로 명동 백작, 댄디 보이라 불려졌던, 모더니즘과 조니 워커,

럭키스트라이크를 좋아 했었다는 한국의 시인 박인환

6.25 전쟁 이후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노래한 이 시를 발표하고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했던 과음이 원인이 돼 5개월 후 19563

세상을 등진 시인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60을 살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먼 나라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생명수를 달라며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던,

6.25후 어려웠던 시대를 살다간 한국의 시인 박인환의 생애중

누구의 생애를 술안주 삼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를 .

정끝별 시인은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는 책에서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여성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우리의 시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통속적인들 어떠랴.

목마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모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이라고 시 평을 달았다